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弈墨 중국 바둑의 고전: 《혁묵》

《혁묵(弈墨)》은 사백 년 전에 간행된 책이다.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일어서던 시기, 중국 강남 지방에서 둔 백 판의 바둑 기보를 담았다. 당시 중국의 바둑은 판 위에 돌 네 개를 미리 놓고 시작했으며, 첫수는 백이 두었다. 규칙은 같지만, 포석의 틀만큼은 백 년 전에 사라진 바둑이다.

어떤 책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혁묵》은 한 시대를 속삭인다…

《혁묵》(弈墨, '묵(墨)'은 본보기라는 뜻으로, 대략 '바둑의 본보기'를 가리킨다)은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들어서던 피비린내 나는 과도기에, 물길로 도시들이 서로 이어진 부유한 땅 중국 강남(江南)에서 패권을 다툰 바둑 명수들의 대국 백 판을 모은 책이다.

그 무렵 중국은 역사상 가장 혹독한 단절 가운데 하나를 겪고 있었다. 1644년 농민 반란군이 베이징에 이르자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스스로 목을 맸고, 북방에서 내려온 만주족이 제위에 올랐다. 한 해 뒤에는 이 대국들이 두어진 남쪽의 부유한 운하 도시들도 함락되었다. 이 책에 나오는 명수들 대부분은 바로 그 시절, 바로 그곳에서 바둑판 앞에 앉아 있었다.

책을 엮은 사람은 화이안(淮安)의 바둑 애호가 이자섭(李子燮)이다. 그가 모은 육백여 판의 기보 가운데 백 판을 골라 평을 붙인 사람은 당대의 일류 기객 계심설(季心雪)이었다. 책은 강희(康熙) 연간 초, 1662년 무렵에 완성되었다. 서문을 쓴 왕섭(王燮)은 북적이던 당시 바둑 명수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여러 명수가 패권을 다투니 쌓인 대국이 천 판을 넘었고, 천하의 국수 수십 명이 장강과 회수 사이를 오갔다(諸子爭雄競霸, 累局不啻千盤. 海內國手幾十數輩, 往來江淮之間)."

이 명수들에게는 궁정의 녹봉도, 대회 상금도 없었다. 생계는 대국을 구경하는 고관과 부유한 상인, 상류층 문인들이 거는 판돈에 달려 있었다. 중국어에는 이를 가리키는 말이 있다. 靠天吃饭(kào tiān chī fàn), '하늘만 바라보고 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본래는 물 댈 방도가 없어 농사를 비에만 맡겨야 하는 농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수고는 내 몫이되, 수확은 내 몫이 아니다.

명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태평한 시절에는 조정 사람들과 상인들이 바둑에 시간과 돈을 들였고 기객들도 넉넉히 지냈다. 그러나 나라가 흔들리거나 전란이 닥치면 후원은 끊기고 밥상은 비었다. 오늘날과 똑같이 부자들만 배를 불렸고, 천재들은 가난 속에 스러졌다. 《혁묵》의 백 판은 그런 천재들이 가장 빛나던 순간을 얼려 둔 한 장의 사진이다.

이 책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사연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다. 《혁묵》은 1662년에 간행된 뒤 삼백 년 동안 한 번도 다시 찍히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에는 이미 찾기 어려운 책이 되어 있었다. 베이징도서관에 한 부가 있었으나 그마저 문화대혁명 때 사라졌다. 오늘 우리가 이 책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1960년대 초 상하이 기사(上海棋社)의 자료실이 책 전체를 손으로 베끼게 해 두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아 있는 단 한 부는 인쇄본이 아니라, 누군가 앉아서 한 줄 한 줄 옮겨 적은 필사본이다.

2004년에는 중국 프로기사 천쭈더(陳祖德)와 왕루난(王汝南)이 엮은, 중국의 옛 바둑책들을 집대성한 스물네 권짜리 특별 총서가 나왔고, 《혁묵》은 그 안에 두 권으로 다시 실렸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잃은 것은 《혁묵》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때 그 목소리를 가능하게 했던 물건 그 자체다.

이 책을 그저 메마른 기보 목록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혁묵》 이전의 중국 바둑책은 대부분 귀의 형태나 사활을 다룬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두 대국자의 이름과 함께 첫수부터 마지막 수, 그리고 승자까지 기록한 완전한 기보는 드물었다. 그래서 《혁묵》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실전 대국집으로 꼽히며, 청대 바둑의 황금기로 들어가는 문을 연다.

자존심 강한 노대가와 과묵한 소년

컬렉션의 중심에는 명나라 최고의 명수 과백령(過百齡, 1587–1660)이 서 있다. 우시(無錫)의 뿌리 깊은 집안에서 태어난 이 소년은 열한 살 때 어른들의 대국을 보고는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是無難也)"고 말했고, 곧 고을의 전설이 되었다.

1651년 가을, 이름난 시인이자 정치가인 전겸익(錢謙益)은 전장(鎭江)을 지나다 바둑 한 판을 구경하고 절구 여섯 수를 잇달아 지었다. 그 가운데 두 번째 수는 전통적으로 과백령을 읊은 것으로 읽힌다.

八歲童牙上弈壇
白頭旗纛許誰干
年來覆盡楸枰譜
局後方知審勢難

여덟 살, 젖니도 빠지기 전에 바둑판에 올랐으니
머리 센 지금, 그 깃발에 누가 감히 손을 대랴.
해마다 옛 기보를 빠짐없이 다시 놓아 보건만
판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아네, 형세 읽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전겸익, 〈경구에서 바둑을 보며 지은 절구 여섯 수(京口觀棋六絶句)〉 제2수

이 책과 얽힌 일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 하나는 도읍 베이징에서 벌어진다. 당대 가장 존경받던 원로 명수 임부경(林符卿)이 귀인들 앞에서 젊은 과백령에게 거만하게 도전하고, 상으로 은이 걸렸다. 과백령은 여러 번 정중히 사양했지만 더는 물리칠 수 없게 되자 판 앞에 앉아 임부경을 내리 세 판 이겼다. 임부경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까닭은 《혁묵》의 첫 열 판이 바로 과백령과 임부경의 대국이기 때문이다. 곧 이 책은 옛 세대의 자존심과 떠오르는 천재가 부딪치는 장면으로 문을 연다. 임부경의 시대는 판 위의 국지전이 저마다 따로 치러지고, 판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단계로 평가된다. 과백령이 가져온 혁신은 판을 하나의 전체로 생각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다음은 과백령과 임부경이 둔 열 판의 기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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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2017년부터 해마다 우시시 시산구(錫山區)에서 과백령배가 열린다. 지금은 중국 최고 수준의 전국 아마추어 바둑대회 가운데 하나다. 대회 방식도 우연이 아니다. 오픈부 우승자가 전년도 타이틀 보유자에게 3번기로 도전한다. 사백 년 전 베이징에서 펼쳐진 무대가 명수의 고향에서 대회 규칙이 된 셈이다. 우리 같은 아마추어가 동아시아에서 나갈 수 있는 대회 가운데 손꼽히게 권위 있는 대회일 것이다!

다시 역사로 돌아가 보자. 젊은 과백령이 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동시대인은 임부경만이 아니었다. 명나라 마지막 명수들 가운데 하나인 허경중(許敬仲)은 컬렉션의 첫머리에서 과백령을 비롯한 여러 기객의 상대로 등장한다. 허경중의 이름은 오늘날 서양 문헌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전부가 이 책에 남은 대국들뿐이다.

다음은 허경중의 대국 네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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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백령은 노년에 고향 우시에서 기방(棋坊), 곧 바둑 학당을 열어 제자를 길렀다. 그는 기객일 뿐 아니라 이론가이기도 해서 《관자보(官子譜)》(끝내기의 책), 《삼자보(三子譜)》(석 점 접바둑의 책), 《사자보(四子譜)》(넉 점 접바둑의 책) 같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집안에서는 궈쉬추(過旭初)와 궈티성(過惕生)이 나왔다. 궈티성은 녜웨이핑(聶衛平)의 스승으로, 베이징 바둑협회의 창립에도 참여했다.
한 집안, 삼백 년!

스무 살 시골 청년

사십 년 뒤, 장면은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된다. 다만 이번에 지는 쪽은 과백령이다. 주라여(周懶予, 1630년경–?)는 자싱(嘉興) 메이리진(梅里鎭)의 가난한 집 아들이다. 가족은 그에게 처음에는 글공부를, 다음에는 장사를 강요했지만 그는 몰래 빠져나가 바둑을 두었다. 말려 보아도 소용없었다. 상대와 내기 바둑을 두어 번번이 이겼고, 밤이면 돈을 한 짐 지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자 가족도 결국 금지를 풀었다.

1644년 항저우에서 맞붙었을 때, 이제 겨우 스무 살이던 주라여는 예순을 넘긴 과백령과 기록에 남은 열아홉 판을 두었다. 그 가운데 승패가 알려진 것은 열두 판이고, 주라여가 아홉 판을 이겼다. 바둑계의 깃발이 주인을 바꾼 것이다.

동시대의 주운(周篔)은 그의 비결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그가 이기는 까닭을 따져 보면, 선수를 쥐면 놓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究其所以勝者, 持先而不失也)." 그 자신의 규칙은 한층 더 날카롭다. "몇 점을 버릴지언정 선수 하나는 잃지 말라(寧輸數子, 不失一先)."

귀로 다가오는 두 마리 제비(쌍비연)에 대한 주라여의 응수.

주라여는 판 위에도 지워지지 않는 발자취를 남겼다. 상대가 귀의 돌 양쪽에서 동시에 다가오는 수, 곧 중국 바둑 문헌에서 쌍비연(雙飛燕), '두 마리 제비'라 부르는 양걸침에 어떻게 응수해야 하는지는 당시 논란거리였다. 한 세대 뒤 서성우(徐星友)는 쌍비연에 맞서 두 돌을 모두 위에서 누르는 수법이 주라여에게서 비롯되었으며 가장 깔끔한 방법이라고 적었다.

그 응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두어진다.

주라여와 과백령이 둔 대국 네 판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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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여의 이 부상은 또 한 사람의 애호가를 이른바 실험실로 끌어들였다. 이원조(李元兆)는 과백령이 주라여에게 진 대국들을 하나하나 검토해 진단을 내린 뒤, 곧장 자싱으로 가서 주라여와 열 판을 두어 여섯 판을 이겼다. 그의 진단은 이랬다. "주라여는 야전(野戰)을 겁낸다. 그래서 나는 야전으로 그를 이겼다(周怯野戰, 吾故以野戰勝之)."

한 세대 뒤 명수 서성우는 이 설명이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고 적게 된다(野戰之言未盡符也). 그래도 이원조가 한 일은, 남들이 그 상대에게 진 대국에서 그 상대의 약점을 찾아낸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하는 일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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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의 고행승

컬렉션의 책장 사이로는 한 승려도 떠돈다. 저장성 영가(永嘉) 출신의 야설(野雪, 1573–1644)이다. 그는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동시대의 풍원중(馮元仲)은 그를 짧게 '영가의 승려 정야설(鄭野雪)'이라 불렀고, 떠돌이 문인 사조제(謝肇淛)는 '영가의 정 두타(頭陀)'라 불렀다. 두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dhūta에서 왔는데, 본래 '털어 낸다'는 뜻으로, 옷과 음식과 거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의 먼지를 털어 낸다는 의미다. 중국에서는 차츰 걸어서 떠돌며 탁발로 사는 승려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야설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평생을 바둑에 바치며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았고, 어디서든 명수의 이름을 들으면 찾아가 그 앞에 앉았다.

1605년, 야설은 난징에서 열린 전국 규모의 대회에 나갔다. 여러 국수(國手), 곧 '나라의 명수'라는 칭호를 지닌 기객들을 꺾은 뒤 왕위안쒀(Wang Yuansuo)에게 졌다. 그는 명나라 3대 바둑 유파 가운데 하나인 영가파(永嘉派)의 마지막 대표 기객이었다. 이제 한 유파, 한 도시의 바둑사 전체에서 기보가 남은 기객은 이 승려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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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와 용 — 휘주의 상인 기객들

명나라의 바둑 유파들은 서로 맞수였고, 저마다 다른 땅이 길러 낸 산물이었다. 야설의 영가가 절과 산골 마을에 뿌리를 두었다면, 휘주파(徽州派)는 정반대의 곳에서 나왔다. 소금 교역으로 부를 쌓은 안후이(安徽)의 도시들이다. 이 소금 상인들은 화가와 서예가를 후원하듯 바둑 기객들도 후원했다.

《혁묵》의 후반부에서는 이 유파 사람들이 무대를 채운다. 화가이기도 했던 왕한년(汪漢年)은 컬렉션에 가장 많은 기보를 남긴 사람 가운데 하나다. 또 한 사람은 당시의 등급 분류에서 명가(名家), 곧 일류 바로 아래의 명수로 꼽힌 왕유청(汪幼淸)이다.

여기에 쑤저우(蘇州)의 성대유(盛大有)와 주동후(周東侯)가 합류한다. 주동후는 청나라 최고의 천재 황룡사(黃龍士), 곧 '용'과 양저우(揚州)의 혁락원(弈樂園)에서 스물다섯 판을 두었다. 황룡사가 16승 8패 1빅으로 앞섰다. 숫자만 보면 압도적인 차이지만, 주동후가 황룡사에게서 거둔 그 여덟 번의 승리에 근접한 사람은 달리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주동후의 별명이 '호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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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름을 새겨 넣은 편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대국을 고르고, 순서를 정하고, 여백에 평을 단 계심설(季心雪)은 단순한 편자가 아니었다. 그 자신도 기객이었다. 그는 컬렉션의 마지막 장들에 자기 대국도 실었다. 자기가 엮은 명수들 사이에, 같은 판 위에, 평가받을 각오를 하고서.
예로 네 판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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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명수들의 실력, 오늘과 견주면

여기 이름이 나온 옛 명수들이 오늘날의 잣대로 얼마나 강했을지, 아마 우리 모두 궁금할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비교를 '시대가 다른 영웅끼리 싸움 붙이기', 더 구체적으로는 '관우와 진경(秦瓊) 싸움 붙이기(關公戰秦瓊)'라고 부른다.

이 물음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다룬 사람 가운데 하나가 20세기 최고의 명수, 중국 태생의 오청원(吳淸源)이었다. 오청원은 과백령의 저작으로 전해지는 《관자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풀어, 1977–78년에 도쿄에서 네 권으로 펴냈다. 천사백일흔여덟 문제를 하나하나 다시 검토한 것이다. 마이클 레드먼드의 말을 빌리면 "중국에서 건너와 일본 최정상 기사로 활약한 오청원은 고대 중국의 바둑을 연구해 그 정수를 익혔고, 그의 강함의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오청원의 평가는 분명했다. 청대 대국수들의 실력은, 그의 표현으로는 "매우 주목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일본의 명인(名人)급에 해당할 것"이었다. 명인은 일본 바둑계의 최고 칭호였다. 즉 일본 바둑계의 기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던 셈이다.

같은 평가는 오늘날에도 되풀이된다. 레드먼드는 같은 글에서 이렇게 썼다. "고대 중국 기사들이 지닌 전투력과 수읽기의 깊이는 현대 기사들도 넘어서기 어려운 힘이다. 우리는 고대 중국의 '싸움 바둑'을 다시 한번 연구해야 한다."

다행히 이제 AI가 이 문제에 조금 더 분명한 답을 줄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KataGo는 중국의 좌자와 환기두 규칙을 지원하는 유일한 주요 엔진이어서, 옛 기보를 처음으로 그 자체의 규칙으로 잴 수 있게 되었다.

그 측정의 가장 진지한 예는 프로기사 추이찬(崔燦)이 2021년에 발표한 통계 연구다. 결과는 놀랍다. 황룡사, 범서병(范西屛), 시양하(施襄夏)는 중반전에서 오늘날 최정상 프로에 근접하지만, 포석에서는 뒤처진다. 추이찬의 데이터는 '옛 명수들은 사실 강한 아마추어 정도였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구체적인 기력 수치를 내놓지는 않는다. 이 신중함이 중요하다. 인터넷에 떠도는 단정적인 수치들, 이를테면 '엘로 몇 점', 'AI라면 두 점을 깔게 할 것' 같은 말은 대부분 어떤 방법에도, 헤아려 본 대국 집합에도 근거하지 않는다.

《혁묵》에 대해서는 AI에게 실제 조사를 맡긴 사례가 있다. 이 대국들 대부분은 누가 이겼는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착수는 기록했지만 결과는 적지 않았다. 백 판의 최종 국면을 하나하나 AI로 계가해 승자를 가려낸 결과, 백이 59판, 흑이 32판을 이겼고, 아홉 판은 차이가 계가 오차 범위 안에 들 만큼 작았다. 백이 이렇게 크게 앞선 것이 강한 명수들이 백을 쥔 대국이 많아서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자연히 먼저 두는 쪽의 이점을 떠올리게 된다. (이 대국들이 두어지던 때에는 아직 덤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같은 조사는 책을 여는 첫 열 판도 다루는데, 뜻밖의 결과를 보여 준다. 임부경이 과백령에게 6 대 4로 앞선다는 것이다. 베이징에서 내리 세 판을 진 노대가가 기록에 남은 대국 전체로는 앞서 있었던 셈이다. 베이징의 그 유명한 세 판짜리 도전 장면이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다 들려주지는 않는 것 아닐까?

그렇다 해도 AI의 판정은 모두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귀의 네 돌이 포석에서 실수할 여지를 좁히기 때문에, AI의 평가가 옛 명수들에게 체계적인 이점을 주고 있을 수 있다. 추이찬 자신도 이 점을 인정한다.

책에 실린 백 판을 이 글에 모두 욱여넣는 것은 물론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컬렉션 전체가 Kifu Master에 있다. 궁금한 명수의 이름으로 검색하기만 하면 된다. 이만 줄인다.
@2026/09/19